늦은 밤 시간, 전철에서 우연히 목격한 중국여학생을 바라보며 느낀 아주 짧은 생각

ama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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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시간, 전철에서 우연히 목격한 중국여학생을 바라보며 느낀 아주 짧은 생각.


이제 과음이 몸만 힘들게 하는게 아니라 그 마음까지 힘들게 하는 나이가 됐나보다.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진하게 풀어진 라면을 먹고 몸이라도 추스르려 애쓰는 중이다. 기실 어제 귀가하자마자 쓰고 싶었던 글이긴 하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사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요즘 그래도 제일 자주 만나 술잔을 나누는 친구는 이건호박사이다. 낙성대 전철역 인근의 조그만 바에서 술 한 잔 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여유롭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어느 순간엔가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거의 닫혀있던 내 귀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너편에 앉은 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 둘이 졸음과 피곤에 힘들어 하던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글쎄, 내가 술을 마셔 그런지 아니면 걔네들도 술을 마셔 그런지 주변을 별로 의식치 않는 걔들의 목소리는 꽤 컸다. 틀림없는 중국말이었다. 아마 둘다 중국에서 여기로 유학 온 젊은 친구들이리라.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웃는 낯으로 아주 재미나게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저 무심히 듣고 있던 내 입가에 어느새 작은 미소가 흐르는 걸 스스로 느꼈다. 하마 20년 전 일이구나. 나도 저렇게 남의 나라 땅에서 그저 신나게 우리말을 재잘거렸던 세월이 있었지. 찻집에 앉아서 재잘거렸고, 학교 강의실에서 재잘거렸고, 선술집에서 재잘거렸고, 맥도날드에서도 그랬다. 그때 대부분은 별 생각 없이 그저 친구들과 나누는 의미없는 대화에 빠져 주변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간히 남의 나라 땅에서 얘네들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너무 크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얘들은 여기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여기 말을 안 하고 지네들 말로만 떠드는구나. 지들은 우리 얘기를 다 알아 들으면서 지들끼리는 지들 말로 지껄여내니 우리가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이건 상당히 언페어 하구나. 어쩌면 지금 쟤들이 우리 얘기를 할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내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난 걔네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봤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걔네들은 우리가 아무리 큰소리로 떠들어대도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동차 딜러 앞에서 우리말로 떠들 때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여기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밤 늦은 시간 서울대학교에서 잠실로 향하는 꽤 시원하게 쿨링이 되고 있는 2호선 전철 안에서 말이다. 물론 전철이나 식당이나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지네들 말로 뭔가를 말하고 있는 외국인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 그리 드물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같은 2호선 전철 안에서 영어로 뭔가를 지껄여대던 서양애들 몇을 보면서 속으로 꼴같지 않게 봤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지들 땅에 살 때, 영어 안 쓴다고 그리 구박을 하더니, 지들은 한국말 한마디도 안하고 저렇게 잘난 영어로 떠들어대고 있구나. 틀림없이 서울 시내에서 교회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강남 언저리의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떨거지겠지. 오죽 못났으면 여기 한국 땅까지 기어들어와 저 짓 하고 있을까. 참 한심한 놈들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아마 두 가지 이유로 그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였으리라. 영어가 아닌 중국말이었다는 점. 그리고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그곳에서 태어나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꼴같잖은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에서 지들 꼬라지에는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까불고 돌아다니는 영어강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여기 이 땅에서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고자 유학을 하고 있는 애들이었다는 점. 그 두 가지 차이점이 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아, 내가 미국 땅에서 한국말로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그 나라 애들이 이렇게 생각했겠구나. 참 신기하게 생겼네. 귀엽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어느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애들이 자기네들 말로 재잘거리고 있구나. 저 딱딱해 보이는 소리를 내서 지네들 의사표현을 다 하고 있구나. 참 신기한 소리네. 쟤들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진짜 어디에서 왔을까. 쟤네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었을까. 여기까지 와서 공부를 할 정도면 지네들 나라에서는 꽤 잘살고 똑똑하다는 애들이겠지. 공부 마치면 지네들 나라로 돌아가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지네들 생활을 시작할까. 그때 쟤네들은 지금 보고 있는 이 낯선 외국 땅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어떤 말들을 할까. 쟤들이 우리 땅이나 우리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기억들을 많이 했으면 좋을텐데. 물론 대부분은 우리가 하는 짓거리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겠지. 그도 그럴것이 그곳에는 지네들 말을 쓰지 않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애들은 한국말로, 대만 애들은 중국말로, 일본 애들은 일본 말로, 심지어는 서유럽이나 아프리카 애들도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간혹 한국말로 떠들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던 미국 애들 시선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겠구나 하고 어제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재잘거리는 중국 여학생 둘을 보며 어제 내가 느낀 생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혹 어제 걔들은 지들을 유심히 쳐다보는 내 눈길을 느끼고는 내가 미국에서 했던 똑같은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다. 내가 지네들을 불쾌하게 생각한다거나 한국말을 안 쓰고 중국말을 쓰는데 대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거나 지들을 너무 떠든다고 힐책하는 눈길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걱정이다.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적어도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사실 난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의 내 생활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참으로 건강하게 미소 짓고 있었긴 하다.

어젯밤에 2호선 전철에서 중국말로 뭔가를 열심히 지껄여대던, 참하게 생긴 여학생 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니들은 중국 어디서 왔니?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중국 어디쯤이니? 날씨는? 중국에 식구들은 누구누구나 있니? 엄마는 뭐하시고 아빠는 뭐하시는 분이니? 아빠 나이가 나보다는 좀 많겠네. 중국에 있는 니 집, 니 방에는 뭐 뭐가 있니? 침대 커버는 무슨 색깔이니? 벽에는 어떤 그림이나 사진이 걸려 있니? 평소 저녁 식사 후에는 식구들이랑 뭘 하니? 식구들이랑 떨어져 여기서 공부한다고 고생이 많네. 한국말 어렵지? 공부는 잘되니? 뭐 전공하고 있니? 언제쯤 집으로 돌아 갈거니? 조금 고생되더라도 지금처럼 예쁘게 밝게 잘 생활해라. 지나고 나면 그래도 지금이 니들 인생에서 제일 좋았던 시간들 중에 하나라고 기억될거다. 잘 공부하고, 원하는 학위 따고, 많이 구경하고, 많이 배우고, 즐겁게 지내다 돌아가거라. 니들이 한국에서 보고 들은 나쁜 일들은 많이 잊고, 전철에서 니들 앞에 앉아 술 취한 눈으로 마음 속으로나마 니들에게 이런 말을 한 아저씨 하나가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니들이 여기 와서 공부해줘서 고맙다. 내 앞에 앉아 예쁜 중국말로 재잘거려줘서 고맙다. 나에게 지난 날을 돌이켜보게 해줘서 고맙고, 과음으로 인해 피곤해진 육체에 그야말로 순수하게 잔잔한 미소를 떠오르게 해줘서 고맙다. 니들,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이제 술로 인한 속쓰림이 어느정도 가셨네.


2008년 7월 29일 이른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