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살인사건 8

ama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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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를 비롯한 나머지 구약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총리의 부모, 형제 그리고 친척으로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집트에서 제일 좋은 땅을 받아 살던 유대인들의 400년 뒤의 생활상은 어떠했나? 한마디로 모두 다 노예로 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건방지고, 이렇게 싸가지 없고, 이렇게 악랄한 족속들이었으니 어느 누가 좋아했겠는가? 약 4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점점 노예로 변해 갔으나 많은 아이를 낳아 인구는 늘어만 갔다.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반가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들이 이집트를 침범해 오는 일이 생기면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인들이 적에게 붙어 이집트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의 행동양태가 이런 걱정을 하게 했겠지. 급기야는 이스라엘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버리라는 왕명이 내렸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레위 가문에서 모세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모세는 바구니에 담겨져 나일강가에 버려졌으나 마침 나들이 나왔던 왕의 딸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주는 모세의 생모를 유모로 삼아 모세를 길렀으며 왕녀의 아들이 된 모세는 궁전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으로 기억들을 하면서도 정작 모세에 대한 내력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왕궁에서 살고 있던 모세는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이집트인 감독관한테 매를 맞고 있는 이스라엘 동포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이집트인 감독관을 죽여 버렸다. 주위에는 모세의 살인을 목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모세는 죽은 감독관을 모래에 파묻고는 도망을 갔다. 다음날 이스라엘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목격한 모세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자 싸움을 하던 이스라엘인이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어제는 이집트인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일 셈이오?’ 모세의 살인이 알려졌고 이집트 왕 파라오는 모세를 잡으려 했고 모세는 외국으로 피신을 했다. 모세는 미디안이라는 곳에서 40년 동안이나 양을 치면서 숨어서 살았다. 결국 모세는 이집트 관리를 죽인 살인자로서 숨어 다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이블 신봉자들은 모세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의로운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일부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동포가 이집트인 관리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모세는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항일투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우리의 독립투사가 일본인의 눈에는 살인자이지만 우리의 눈에는 영웅으로 보이는 것이다. 모세도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겐 의로운 영웅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우리 동포들에게 같은 동포도 죽일거냐는 항의를 듣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곳에서 살인을 한지 단 하루 만에 이스라엘인이 모세에게 오늘은 나를 죽일거냐고 묻는다. 아마 모세가 쉽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비쳐졌나 보다. 그것도 약간의 시비가 붙은 같은 이스라엘인 동포를 말이다.


모세가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이라는 곳에서 양을 치며 숨어 지낸지 40년이 지났을 때 여호와가 모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라고 말했다. 모세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결국은 형인 아론과 함께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이때,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밝힌다. 단순한 엘로힘(‘신들’이라는 뜻)에서 여호와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밝힌 것이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80살이었고 아론은 83살이었다.

그런데 모세가 가족을 이끌고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갈 때, 여호와가 모세를 죽이려 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었다. 모세는 아들들에게 할례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안 여호와는 모세를 죽이려 한다. 깜짝 놀란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부랴부랴 아들들을 할례하여 겨우 모세의 목숨을 건졌다. 잘난 바이블 신봉자들은 모세는 아들들을 할례 하려고 했으나 아내인 십보라가 심하게 반대하여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고 문제가 있다. 여호와는 모세 아들들이 할례를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고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지도자로 모세를 선택했던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는 아들들의 할례 여부에 관계없이 모세라는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라고 우기고 싶겠지. 중요한 건 할례여부가 아니라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신앙심이고 그래서 전지전능한 여호와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모세를 선택한 것이라고 빠락빠락 우기고 싶겠지. 왜냐하면 여호와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는 존재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바이블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지도 않았고, 착하지도 않았고, 참을성도 없었고, 이성적이지도 않았다. 여호와는 뒤늦게 모세의 아들들이 할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모세를 선택한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고, 할례를 하라고 권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기가 선택했던 모세를 죽이려 한다. 전지전능하다는 여호와가 모세의 아들들이 할례를 했는지 안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아이들을 할례하지 않은 모세를 선택했던 건 여호와 자신인데 오히려 화를 내며 모세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살인을 하고 도망가서 나이 80이 되도록 숨어서 잘 살고 있는 자신에게 어느 날 여호와가 나타나서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라고 시켰다. 싫다고 안하겠다고 하는 모세에게 억지로 그 일을 맡긴 건 여호와다. 그래놓고는 아들들을 할례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여호와가 말이다. 황당하지 않은가? 황당했을 것이다. 모세는 여호와로부터 지도자로 선택 당하지 않았었다면 이렇게 죽을 뻔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괜히 제가 선택해 놓고 그 선택에 실수가 있으니까 이번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아예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여호와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은 지극히 상식적이지 못하다.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이니까 그게 신이고 신다운 거라고 생각하는 아주 전근대적인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비상식적이고 인간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더 이상 존중되어져야 하는 신이 아니다. 과감히 버려야할 낡은 신인 것이다. 잊지 말자. 신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신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신에게 끌려 다니다가는 신을 앞세운 교활한 몇몇 사람들에게 당하는 꼴이 된다. 그건 우리가 바이블을 믿는 사악한 종교집단이 누천년에 걸쳐 저지른 인간에 대한 죄악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했던 일이 아닌가?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신을 믿는 종교는 결국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이 되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만히 잘 숨어 있는 사람을 꼬드겨서 일을 맡겼으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지. 아이들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어디 또 있겠나? 그리고 사람을 죽일 만큼 할례가 중요한 사항이면 사람을 선택하기 전에 아이들을 할례시켰나 아닌가 하는 정도는 알아보고 선택을 했어야지. 더군다나 세상일을 다 알고 있다고 구라 푸는 놈이 그만한 것도 모르나? 모르긴 몰라도 모세가 선택된 것은 특별히 그가 훌륭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파라오와 협상을 하기에 적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도망 나온 것이거나. 여호와의 명령 없이 말이다. 왕궁에서 살던 모세가 살인을 저지르고 쫓겨 다니게 되니까 동족들을 꼬드겨서 도망가서 살게 된 것이겠지, 동족들 사이에서는 왕 노릇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다.


어쨌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를 찾아가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광야로 나가 제사를 올리고 와야겠다고 말했다. 다른 곳에 가서 살겠다고 얘기하면 보내줄 리가 없으니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속을 뻔히 아는 파라오가 이를 승낙할 리는 만무하다. 제사를 지낸다는 건 핑계일 따름이고 이집트를 도망치려는 심사를 다 알았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상당한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쉽게 노예를 잃을 수야 없지 않겠나? 그런데 여기서 왜 이집트 왕 파라오는 살인자 모세를 감옥에 처넣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40년이면 살인에 대한 시효가 지났나? 어쨌든 이집트인들은 모세의 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노예들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고 이스라엘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고 한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인들을 쉽게 보내주지 않자 여호와의 눈물겹도록 악랄한 재앙이 시작된다. 여호와의 잔인함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대목이다. 여호와는 파라오가 수많은 노예를 모두 포기하고 놓아줄 때까지 다음에 열거되는 수많은 잔인한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이집트인을 상대로 한 여호와의 재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론이 지팡이로 나일강 물을 내리치자 나일강 물이 전부 피로 변했다. 모든 물고기는 죽고 악취가 나서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둘째, 아론이 강과 운하, 늪을 가리키자 모든 물에서 개구리가 올라와 온 땅에 넘쳐 났다. 셋째, 아론이 지팡이로 땅을 치자 땅의 먼지가 전부 이로 변했다. 그리고 이 이는 사람과 동물을 공격했다. 넷째, 이집트 지역에 수많은 파리 떼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이 사는 고센 지방은 그렇지 않았다. 다섯째, 이집트의 가축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섯째, 이집트인과 그들이 기르는 가축들에게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곱째, 하늘에서 심한 벼락과 우박이 쏟아졌다. 여덟째, 온 이집트 땅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모든 식물들을 먹어 치웠다. 아홉째, 하늘이 어두워져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드디어 파라오는 이렇게 악독한 인간들을 상대 않기로 작정하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가축은 가져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가축도 데려 가야겠다고 했다. 사실 이스라엘인들은 노예 신분이었는데, 소유한 가축이 얼마나 되겠나? 자신들이 맡아 기르는 주인들의 가축까지 가져가야겠다는 것이었겠지. 파라오는 이 말을 들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가축은 두고 사람은 가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이스라엘인과 여호와가 가축을 포기할 리가 없다. 드디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블에서도 가장 잔인한 장면 중의 하나가 여기서 발생한다. 물론 노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쓸어버린 것보다는 덜하지만 말이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집안의 사람과 짐승, 모두의 처음 난 것, 즉 장자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이집트 내에서 한 집도 빠짐없이 장자와 처음 난 가축들이 죽었다. 무사한 집은 단 한 집도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파라오는 할 수 없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했다. 당시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인이 20세 이상 남자만 6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인들은 모두가 이집트인의 노예였던 것이다. 노예로 부리던 이스라엘인의 수가 이렇게 백만이 넘었으면, 이집트인의 수도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집집마다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어 나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악마 같은 인간이 있었는가? 이스라엘인을 보내지 않겠다고 한 파라오는 그렇다 치고, 정말 아무 죄 없는 이집트인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장자를 잃고, 가축을 잃었다. 혹자는 이때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인들의 숫자보다 이집트인들의 숫자가 적었다고 얘기한다. 적은 숫자의 이집트인이 많은 숫자의 이스라엘인을 노예로 거느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더라도 그 희생자는 엄청난 숫자이며, 더군다나 모든 장자가 하나 남김없이 죽었다는 게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큰 기념일 중의 하나가 유월절이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이 날을 기념한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전 이집트인들이 장자와 가축을 잃은 날이다. 실제로 유월절은 밤에 지내는 유일한 의식이다. 그날 밤에 모든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나 남김없이 죽어 나간 것이다. 실제로 유월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일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이집트의 모든 사람과 가축의 맏이를 죽이면서 이스라엘인들을 죽이지 않은 여호와라는 깡패새끼의 한량없는 자비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이 날의 버릇대로 유대인들은 그 후 3500년 뒤에 가나안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그 많은 팔레스티나 인들을 죽이고 자기들 살고 싶은 곳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가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역사까지 왜곡하는 일본도 이보다는 많이 낫다. 그들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독도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고 있다. 물론 세상에는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는 일들은 있어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르기는 한다. 하지만 여호와라는 이 사악한 존재가 개입되지 않은 한, 이렇게 한 나라 안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장자가 하나 빠짐없이 희생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엉터리 같은 바이블이라는 책을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못 읽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니면 제대로 평가를 하든지. 더군다나 이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일과는 다른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이집트로 이주해 갔고 오랜 세월 살면서 신분이 노예로 전락해 간 것뿐이다. 더군다나 처음에 그들은 총리의 친척으로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해 갔던 것이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간의,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이 아닌 것이다. 단지 400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에 얹혀살다가 게으르고 싸가지없이 굴다가 잘 못살게 되어 노예로 전락했고, 지금 그 곳을 도망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가축과 재산을 노략질해서 말이다. 뻔뻔스럽게 그들이 전 이집트의 장자를 다 죽여 버릴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비유해 보면 머리 나쁜 바이블 신봉자들이 이해를 하려나? 이것은 오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몇 년 혹은 몇 십년 일본에 의해 강점당해 자유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인은 우리 땅에서 물러나라고 외치고 싸우는 독립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땅에 강제로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하며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가는 일본을 물러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그들을 못살게 군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지금 일본에 살면서 많은 부채를 진 우리 교포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모여서 이제 여기서 안 살고 다른 땅에 가서 살겠다며 도망을 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은행 부채는 산더미 같은데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다 가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하자 일본인의 모든 장자를 하나 빠짐없이 전부 죽여 버린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우리 교포들이라지만 이건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만행이다. 그리고 이들 재일 교포들의 조상이 400년 전에 충청도 지방에서 살았다고 치자. 그들은 조상이 살았던 땅, 충청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잘 살고 있는 우리 선량한 충청도 주민 전부를 내몰고 그 땅에 자기네들의 나라를 세우고 살겠다고 우기면 어떻겠는가? 우습지도 않겠지. 하지만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모세라는 살인자에 의해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50년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인의 이런 억지스런 도발이 되풀이되었다.


결국 하룻밤 사이에 나라 안의 모든 장자를 잃은 파라오는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인들이 떠나가도록 허락했다. 처음에 모세가 요청한 일은 분명히 단지 광야에 나가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들 이스라엘인들이 이 약속을 지켜 제사를 지낸 후 이집트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북쪽 길이 훨씬 빠르지만 북쪽에는 이집트 군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남쪽의 홍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들이 홍해가 있는 곳에 막 다다르자 뒤에서 이집트 군대가 뒤쫓아 왔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인들이 제사만 지내겠다고 얘기하고는 모든 가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 은, 옷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도망을 가고 있으니 이집트인으로서는 당연히 급히 군대를 조직하여 이들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강한 군대였겠는가? 여호와와 모세는 불과 며칠 전에 이집트 내에 있는 모든 장자는 하나 남김없이 다 죽였다. 이제 장자가 아닌 남자들과 여자들만이 남아서 겨우 장례를 치르고, 그들 장자의 죽음을 실감하기도 전에 겨우 몸을 추스린 남자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온 것이다.

홍해에 다다른 이스라엘인들은 홍해에 가려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자기들을 끌고 나온 모세를 원망했다. 그러자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었고 그러자 홍해가 둘로 갈라져 바다 사이로 마른 땅이 드러났다. 그 사이로 이스라엘인들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고 뒤이어 바다 사이로 이집트 군대가 뛰어 들었고 다시 모세가 손을 치켜들자 바닷물이 닫히며 이들 이집트 군대를 집어 삼켰다. 바이블에는 이집트 군대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한다. 물론 바이블이 워낙 엉터리 책이니까 믿을 게 하나도 없지만, 바이블 신봉자들이 우기는 것처럼 바이블이 오로지 진실만 말하고 있다면, 여기서 이집트 장정 남자들은 또 다 죽어 갔다. 며칠 전에 이집트인의 모든 장자가 하나 남김없이 죽었고, 이제 그나마 남아 있던 남자들 중 군대에 참가한 사람들은 또다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다.

이때 이스라엘인들이 군대를 조직한 20세 이상의 남자만 60만명이고 전체 인구는 수백만명이라고 한다. 이때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은 이집트 군대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이집트 인구가 이스라엘인들보다 적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모든 장자는 다 죽고 나머지로 겨우 장례도 채 마치지 못하고 군대로 나온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군대에 갈 수 있는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전부 다 나올 수도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으로 통하는 가까운 길인 북쪽 길을 피해 홍해로 돌아간 이유가 북쪽은 이집트 군대가 수비를 하고 있는 곳이라서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장자를 잃은 이집트인들이 며칠 만에 급조하여 뒤쫓아 온 군대인데, 그들이 얼마나 숫자가 많았으며 얼마나 강력한 군대였겠는가? 이는 이집트인이 이스라엘인을 뒤쫓은 게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도주를 만류하던 불쌍한 이집트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수장되어 죽었다. 여호와나 모세라는 깡패새끼가 바닷물을 가른 게 아니라, 어디 구덩이라도 파서 불쌍한 이집트인들을 수장시켰나 보다. 홍해는 홍해가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들이 그 속으로 걸어 다닐 만큼 갈라진 적이 없다. 그날이라고 예외일리는 없겠지. 수백만년, 수천만년, 수억년 동안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날만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고 있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하기사 여호와라는 신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우주만물을 말 한마디로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뭐라 달리 할 말은 없다. 자기 자신을 과학적이라고 천명하는 바이블 중독자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진화론은 아주 훌륭한 학설이긴 하다. 하지만,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탄생하고 더군다나 인간만큼이나 정교한 생명체가 만들어졌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이는 마치 하얀 캠버스 위에 물감들을 마구 뿌려 모나리자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명화가 그려지는 확률로 현실적으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쇳덩이와 플라스틱을 던져 정교한 컴퓨터가 만들어지는 일이 있겠는가?’ 그래, 참 훌륭한 얘기다. 정말로 모나리자가 그려질 때까지 물감을 뿌린다면 몇억년이 걸려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다. 물론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질 확률은 이보다는 훨씬, 훨씬 더 높다. 실제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바이블대로 있으라는 말 한마디에, 생기라는 말 한마디에 없던 게 생기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되지? 이는 물감을 뿌려 모나리자를 그리는 확률보다 높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제로에 가까운 게 아니라, 제로 그 자체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감을 뿌려도 안 그려지는 그림이 물감도 종이도 없이 그려져라 하면 그려지나? 종이 앞에 앉아서 그려져라 그려져라 수억년을 해봐라, 그림이 그려지나. 다른 어떤 사람도 말 한마디로 이를 만들 수는 없지만 여호와는 할 수 있다. 여호와는 말 한마디로 우주를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없던 걸 있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나. 이 또한 제로에 가까운 게 아니라 제로 그 자체이다. 확률이 이렇게 제로가 나오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혹시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 혹은 신선은 존재할 수 있는 확률이 제로에 가깝지만 그래도 조금은 있다. 이렇게 명쾌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는 여호와뿐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존재로 바이블은 여호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가 우주 모든 존재를 만들었다면, 우리같이 아무 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가 왜 이 여호와라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존재를 두고, 있네, 없네, 믿니, 안 믿니, 찬양하고 헐뜯고, 심지어는 싸우고 하는 것인가? 왜 수많은 나 같은 사람이 그 존재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며,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노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우습게 여겼나? 우주를 만들었다는 그 존재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나타나서 그를 추방하고, 카인을 추방하고 노아에게 나타나 노아만 남기고 모든 생명체를 멸절시키던 그 존재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미쳐 못 없애버린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생명수를 따먹고 자기들처럼 영원히 살게 될까봐 밤낮없이 생명수를 지키고 있나? 모세라는 정신 나간 놈이 이 엉터리 소설책을 쓰다가 인간을 비롯한 우주 삼라만상이 어떻게 생겨났나를 걱정하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구라를 푼 것이 여호와가 있으라고 하니 없던 게 저절로 생겨났다는 얼토당토않은 이 이야기인 것이다. 이걸 진짜로 믿고 신앙이 어떠니 하고 앉아 있는 꼬라지는 정말이지 가관이다. 차라리 말 한마디로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원래 있었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차피 기원을 물고 올라가면 그냥 원래 있었다는 말 말고는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 창조론도 진화론도 모두 다 같은 처지이다. 여호와가 말 한마디로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더라도, 그 여호와는 누가 만들었나? 여호와를 만든 존재가 따로 있다면 아주 우스운 꼴이 되겠지.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한가지일 것이다. 여호와는 원래 있었다. 그러면서 그네들은 우주는 원래 있었고 생물은 무기물에서 합성되었으며 진화했다는 말은 부정한다. 바이블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 꼭 여호와가 우주 삼라만상을 다 만든 걸로 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유독 여호와만 원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호와가 만들었다고 우기는 한심스러운 억지를 언제나 되어야 그만 둘지, 한심스럽고도 걱정스럽다. 잘 알아 두시라. 여호와가 원래 있었던 게 아니고, 우주 삼라만상이 원래 있었던 것이다. 무기물 중 일부는 원래 있었고, 블랙홀이라도 원래 있었다, 세상은 원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가 원래 있었던 무기물이 아니라면 그런 엉터리 주장은 이제 그만 두시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이제는 엉터리 같은 소설책에 중독되어 아편중독자처럼 굴지 말고 인간으로 돌아와서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행동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답게 살아야지. 제발 따뜻한 가슴으로 생각을 좀 해보라. 어떻게 바이블이라는 모순투성이의 소설책을 진짜라고 믿고 무지몽매하게 살아가고 있나? 너무 오랜 세월동안 바이블에 빌붙어 온갖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 특권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강요해온 엉터리 생각을 이제는 떨쳐 버리고 진정한 인간으로, 진정한 자유인으로 독립을 해야지. 이제는 정신 나간 바이블 신봉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염려도 어느 정도는 사라졌다. 인간으로, 자유인으로 독립을 선언하자. 더 이상 엉터리 사람들이 모여 엉터리 주장을 되풀이하며 엉터리 믿음을 강요하는 곳에는 발걸음도 하지 말자.

지금 서울 하늘을 한 번 쳐다보라. 하늘을 찌르고 있는 수많은 교회의 십자가들을 보시라. 한심하고 걱정스럽다. 이건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거대한 정신병자 수용소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를 생각해 볼 것이다. 10년 뒤, 100년 뒤, 혹은 1,000년 뒤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천년 뒤의 이 세상은 어떨 것 같은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독생자가 재림하여 죽은 사람과 산 사람과 여호와와 그 아들 예수가 다 같이 모여 천년왕국을 누리며 살 것 같은가? 진정으로 그렇게 믿고들 있나? 그렇다면 그 천년 뒤에는? 천년왕국이 끝난 뒤에는? 잘 모르겠나? 이건 어떤가? 만년 뒤, 십만년 뒤, 혹은 백만년 뒤에는 어떤 세상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지. 인간이 한국에서 미국을 가는데 10시간 이상을 비행기라고 불리우는 낡은 쇳덩이에 타고 앉아 있지는 않겠지. 간단한 기계 조작으로 단숨에 미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치 ‘이제 미국에 가 있으라’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미국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사람이 사는 거의 모든 방식이 전부 다 지금하고는 다르겠지. 어쩌면 여호와의 생명수를 훔쳐오지 않아도 인간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백만년 뒤에는 말이다. 아니면 천만년 뒤에는 말이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다. 그때에는 바이블이라는 엉터리 책을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저 옛날에 한심스런 사람들이 이런 엉터리 중에도 가장 엉터리 같은 책을 진짜인 줄 알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믿고 살았다는 얘기만 전설처럼 전해지겠지. 하지만 그때도 이 바이블이라는 책을 구해 읽어 본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이해를 못할 것이다. 혹성탈출이나, ET나, 그 어떤 공상과학소설보다 더 엉터리라는 게 뻔히 보이는 이따위 책을 가지고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인간들이 그런 해프닝을 벌였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이 엉터리 책이 수천년 동안이나 인간을 기만하고, 속이고, 지배해 왔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데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천만년 뒤에도 사람들이 바이블을 믿고 있을 것으로 보이나? 아니면 그때는 여호와와 예수와 같이 모든 인간이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면 왜 지금은 아닌가? 지금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진심으로 믿지를 않아서 지상낙원이 오지 않는 건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여호와만 믿고 앉아 있는 일만으로는 아무 것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 가능하다면 백만년 후에 만나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누어 보자. 지금 바이블을 믿는 사람과 나와 둘이 백만년 동안 같이 살며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백만년 후에 그 사람은 나에게 뭐라고 변명을 할까? 아마, 그냥 웃어넘기겠지. 나도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얘기를 다시 꺼내기조차 남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 뻔하다. 어쩌면 세상을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시스템을 관리하는 중앙컴퓨터 같은 존재의 이름이 여호와 일수는 있겠다. 어쩌면 인간은 하나하나가 다 자기만의 우주와 세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 자기가 만든 자기만의 세상 말이다. 그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우주요, 세상이요, 신이요, 여호와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절대로 바이블에 나오는 여호와같이 악독하게 굴지는 마시라. 착하게, 인간답게 사는 게 좋은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엉터리 책을 과감히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자.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도망나온지 3개월이 지나서 그들은 시내산에 도착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시내산 정상으로 오라고 했다.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소위 십계명이라고 불리는 열 가지 규범이 적혀 있는 석판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모세이외에는 아무도 시내산 가까이에 못 오게 했다. 그리고 만약 누구라도 시내산 가까이에 오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로부터 십계명 석판을 받아오는데 40일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시내산은 온통 연기에 둘러싸였으며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산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땅이 울려 마치 나팔이 울리는 듯했다고 바이블에 쓰여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우선 십계명을 살펴보자. 십계명은 여호와의 눈으로 볼 때, 이집트인들이 꼭 지켜야할 열 가지 간단한 규범이다.

1. 너는 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2.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는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을 하지 말라.

7. 간음을 하지 말라.

8. 도둑질을 하지 말라.

9. 네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보시다시피 앞의 네 가지는 이스라엘인들과 여호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다. 기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후반부 6가지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규정했다. 바이블 연구자들 사이에 다섯 번째 부모를 공경하라는 규정을 부모를 여호와의 대표라고 봐서, 전반부 다섯 가지를 여호와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보다 약 900년 전에 우리의 단군할아버지께서는 18가지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단군이 만든 규범이 조금 더 구체적이었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규범들로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임엔 틀림없다. 조금 특이한 것은 네 번째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다. 일주일에 6일은 일을 해도 되지만 7일째는 절대로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날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꼭 죽이겠다고 여호와 특유의 독설을 퍼붓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에 일을 하면 죽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아까 언급했던 두 가지 의문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는 왜 이 단순한 규범을 석판에 새겨 주는데 40일이나 걸렸는지 모르겠다. 아마 십계명을 새기는데 걸린 시간이 아니라 십계명을 정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전지전능하다는 여호와가 정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여호와처럼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고 우주에서 유일한 완벽한 존재라면, 이런 단순한 규범을 정하고, 또 석판에 새기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면 우주를 만들 때처럼 그냥 ‘십계명아, 있어라!’ 하면 그냥 생겨날텐데 말이다. 더구나 모세 같은 한낱 어리석은 인간하고 규범의 내용을 상의한다고 늦어진 것은 아닐테고. 히브리어 바이블의 내용대로 여호와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다수의 존재였고, 십계명의 내용을 놓고 이들간의 논란과 합의가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의 의문을 제기하면 이 문제는 더욱 더 명확해 진다. 왜 여호와는 모세이외에는 아무도 시내산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을까? 시내산 가까이에 오면 누구라도 틀림없이 죽이겠다고 했다.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영화처럼 그림을 그려보자. 모세 혼자 산으로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절대로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모세가 산으로 들어가자 산은 온통 연기로 휩싸였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나팔을 부는 듯이 산이 흔들리고 땅이 요동을 친다. 혹시 친숙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사람들은 없는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다. 여호와는 다수의 우주인들이었던 것은 아닐까? 모세가 산에 오르고 꼬리에서 연기를 뿜으며 우주선이 내려앉으니,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와 불빛이 흡사 천둥과 번개같이 보였을 것이다. 산이 흔들리고 땅이 요동을 하고 온통 연기에 휩싸이고 나팔소리가 나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다른 사람들을 산 가까이에 못 오게 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 자신들이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복수의 우주인이라는 걸 숨길 필요가 있었겠지. 뭔가 모를, 확실치 않은, 신비스런 존재로 보였을 때, 더욱더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른 가능한 한 가지 이유는 우주선이나 그 장비 등에서 나오는 전자파 내지는 원자력, 방사능, 혹은 이와 흡사한 어떤 인간에게 치명적인 게 있었을 수 있다. 현대의 지구인이 우주에 나갈 때 우주복을 입듯이 말이다. 모세에게는 이런 우주복을 입혔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는 없고 더구나, 우주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똑같이 생긴 (똑같은 우주복을 입었으니 당연히 똑같이 생겨 보일 것이다.) 여호와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랬다가는 사람들로부터의 경외심이나,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위신이 깎이는 일이었겠지. 사실은 여호와가 다수의 우주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단서는 바이블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된다.

지금까지 훑어본 창세기에서도 이런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바이블의 첫 부분을 살펴보자. 바이블의 제일 첫 부분, 창세기의 첫 부분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다시 한 번 얘기 하지만 히브리어 바이블에는 ’엘로힘‘이라고 되어 있고, 이는 ’신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글로 번역을 하면서 교묘하게도 우리의 하늘님을 흉내 내어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혀 국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바이블하고 상관도 이 작명된 엉터리 이름일 뿐이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게 바이블의 제일 시작이다. 여호와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했다고 한다. 운행하다는 뜻은 히브리어 원어에는 새가 하늘을 날듯이 움직이는 걸 표현한 단어이다. 바이블의 원어 그대로를 쉬운 말로 번역을 하면 ‘어두움 속에 여러 신들이 수면 위를 날아다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걸 여호와라는 여러 신들이 탄 우주선들이 안개 낀 어두운 호수 위를 나는 것을 표현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창세기에서 한 부분만 더 언급을 하자.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자 사라는 자신의 노예인 하갈을 아브라함 방에 넣어 잉태하게 했다. 하지만 사라가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같이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을 상대로 두 번에 걸쳐서 꽃뱀 사기를 친 바로 그 여자 아닌가? 막상 하갈이 잉태하자 사라는 하갈에게 온갖 구박을 다했다. 사라의 구박을 참지 못하고 하갈은 도망을 간 적이 있었다. 도망치는 하갈이 광야의 샘물에 닿았을 때, 여호와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돌아가 여주인인 사라에게 복종하며 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하갈은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했다. 하갈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돌아가는데, 하갈은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진짜로 여호와를 만난건가? 내가 여호와를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나?’ 이 말 뜻은 무엇인가? 여호와는 단지 만나기만 하면 죽는 존재인 것이다. 여호와는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둘 중에 하나겠지. 만나기만 해도 사람이 죽어버릴 정도로, 전염병처럼 악독하고 나쁜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좀 전에 얘기한 우주인이나 우주선이 가진 어떤 원자력, 방사능 같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그 무엇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을 뜻한다. 만나보면 죽게 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여호와가 우주인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여호와가 야곱에게 나타나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고 나서 야곱이 자신이 여호와를 대면하고도 죽지 않았다고 감탄하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여호와라는 존재가 사람이 만나기만 해도 죽는 존재라는 것은 정말 좋은 얘기다. 나도 이런 잔인하고 악독한 놈은 정말 만나고 싶지 않다. 여러분들도 이런 놈은 아예 멀리 하시라, 만나면 죽을지도 모른다. 또 죽지 않더라도 하나 배울 게 없는 망나니 같은 놈이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다. 잘못하면 물든다.

바이블에는 여호와와 직접 만나면 죽게 된다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이를 두고 얼간이 같은 바이블 신봉자들은 여호와는 워낙이 완벽하고 지고지선한 존재라 인간이 감히 마주 대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런 고로 얼굴을 맞대면 죽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러분은 이 말이 믿기는가? 혹시 이 말이 믿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해 보라. 세상에 완벽하게 선한 무엇인가가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보면 죽게 된다? 만약 지고지선하다는 그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화학물질이나 방사능 같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그 무엇인가를 내뿜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호와가 바이블에서 말하고 바이블 신봉자들이 믿는 대로 완벽히 선한 존재라면 이런 인간에게 치명적인 무엇인가를 내뿜을 리는 없다. 여호와는 자신이 내뿜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소를 제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거나, 지고지선한 게 아니라 지극히 악한, 완벽하게 악한 존재라는 것 이외에는 다다를 수 있는 결론이 나에게는 없다. 착하고 선하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려는 존재라면 결코 인간이 보면 안 되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언제나 인간과 같이 어울리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존재가 진짜 의미의 선한 존재가 아닐까? 여호와는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다. 선한 존재를 쳐다봤다고 인간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바이블이라는 소설책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지극히 선하지도 지극히 악하지도 않지만 몸이나 옷이나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 치명적인 독소를 콘트롤하지 못하는 존재, 우주인인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고, 그곳은 온통 연기와 천둥, 번개로 휩싸인 채 40일이 지나니 사람들은 모세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호와가 모세를 죽여 버렸다고 생각하고, 아론에게 부탁하여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론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녹여 소의 형상을 만들어 그들에게 내주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금으로 소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여호와라고 믿고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여호와는 또 화를 내고 ‘저들을 전멸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다. 모세가 겨우 이런 여호와를 달래놓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만들어 가지고 온 두 장의 석판을 내던져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그 날 여호와에 의해서 이 사건의 주모자와 동조자 삼천 명이 죽었다고 바이블은 말한다.

여기서도 여호와의 광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걸 두고 모두를 전멸시키려던 여호와가 지극히 아름답고 선한 생각으로 모두를 용서하고 불과 삼천 명밖에 죽이지 않았다고 여호와의 그 끝없는 자비스러움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이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줘야 하나? 한심스럽고 한심스럽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십계명을 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비록 소의 형상을 만들긴 했으나, 사람들은 분명히 이를 여호와라 생각하고 제물을 드렸던 것이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준 여호와에게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있었던 것인데 다짜고짜 삼천 명이 죽어 나갔다. 이 삼천 명의 주모자와 동조자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이 악독한 여호와와 모세로부터 핍박을 받았겠는가? 그리고 정작 소의 형상을 만든 장본인은 아론인데 아론은 죽이지 않았다. 아마 아론은 주모자도 동조자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 모세와 아론이고 모세는 산에 들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아론이 이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더군다나 바이블에는 분명히 아론이 소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와 그 나부랑이들은 항상 힘없고 착한 사람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워 죽이는 버릇이 있다. 늘 당하는 건 불쌍한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순수한 마음에 여호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금으로 상을 만든 것뿐이다. 소에게 감사를 드린 게 아니란 말이다. 더군다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도 받기 전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다고 여호와라는 망나니는 이들을 전멸시키겠다고 미쳐 날뛰는 것인가? 조그마한 자비심, 아주 조그마한 인간적인 애정이라도 가진 존재면 이렇게 미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정작 소를 만든 아론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삼천 명이라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우리는 이런 여호와의 악독한 짓거리를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그놈을 만나게 되면 가차 없이 복수를 해야 한다.

석판을 깨뜨려 버린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또 40일을 보내며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 두 개를 다시 만들어 온다. 여기서 또 이 간단한 십계명을 두 개의 석판에 새기는데 40일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여호와라는 존재는 다수의 우주인들이었고, 그들의 고향이나 혹은 다른 혹성에서 특별한 석판을 가져오는데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뭔가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서 지구에는 없는 석판을 우주로부터 가져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여호와랑 모세랑 둘이 이마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서 40일 동안 정성들여 돌에 글을 새기고 있었거나. 그런데 여기서 왜 두 개의 석판에다가 십계명을 새겼는지 모를 일이다. 간단한 문구로 봐서는 하나면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다. 어떤 이들은 십계명의 내용을 두 판에 나누어 새겼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여호와와 모세의 계약이니까 여느 계약서처럼 두 개를 만들고, 여호와와 모세가 하나씩 나누어 가져야 하는데, 여호와는 영적인 존재라서 석판을 가질 수가 없고 모세가 둘 다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상상력이 어린 아이처럼 충만하고 귀엽기조차 하다. 여호와를 영적인 존재로 올리려다 보니까 별의별 억측을 다한다. 내 생각엔 영적인 존재는 계약 같은 건 하지 않을뿐더러 꼭 계약을 하더라도 돌에 글을 새기는 짓은 않을 것 같다. 그것도 40일 동안이나 정성들여서 말이다. 그저 마음에 새기면 될 일이다.

두 번째로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머물면서 모세는 두 개의 석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들고 왔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너무나 빛이 나서 사람들은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는 베일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아마 방사능 찌꺼기가 남아 있었나보다. 적어도 40일 동안을 다수의 우주인과 생활한 모세의 얼굴엔 뭔가 변화가 있었나보다. 모세는 형인 아론을 대제사장에 임명하고 다시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바이블에는 하늘에 있는 구름이 내내 이들의 길을 안내했다고 한다. 여호와는 구름 사이에서 이들을 안내했다. 하늘에 있는 구름이 길을 안내했다니, 이 무슨 장면인가? 여호와를 태운 우주선이 꼬리에서 연기를 뿜으며 저만치 앞서 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