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살인사건 9

ama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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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도망 나온지 1년 2개월이 지나 그들은 가나안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나안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정착해 잘 살고 있었다. 결국 무력으로 뺏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자기들의 땅을 가져 보지 못한 이스라엘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쓸 수 있는 건 무력과 억지 이외에 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무력으로 땅을 뺏으려고 가나안에 정착해 있는 사람들의 세력을 정탐해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온 모세를 원망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편안한 노예 생활을 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들은 여호와는 또 모든 사람을 절멸시켜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모세가 이를 말렸다. 이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40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이스라엘인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여호와가 모두를 죽이겠다고 날뛰고 모세가 이를 말리고 하는 일이 어린애 소꿉장난하듯이 수도 없이 되풀이된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40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이유도,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인들이 기존 가나안 정착인들을 무력으로 몰아내는데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겠지만, 바이블에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모세를 원망하자 여호와가 자신을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뒤인 40년 후에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주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여호와가 그렇게 자주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이집트에서 모든 장자를 죽이는 것을 포함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르고, 삼천 명의 우상 제조자 및 동조자를 죽이고, 석판에 글을 새겨 주고, 별 짓을 다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호와를 잘 믿지 않았다는 건 참 희한한 일이다. 당신 같으면 이 모든 것을 목격하고 직접 겪었는데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인가? 아마 여호와라는 존재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였거나, 별볼일없는 존재였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그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믿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엉터리 바이블이라는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그런데도 이 엉터리 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걸 보면 참 인간이란 단순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바이블 및 그 추종자들이 갖은 협박을 하고 있으니 겁 많고 순진한 사람들이 속아 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모든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도 속지 않은 것에 왜 지금의 내가 속고 있는지 한번쯤 깊이 반성하고 하루빨리 그야말로 몽매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시라. 여호와가 없는 세상은 훨씬 더 안락하고, 불안하지 않으며, 사람 냄새가 나고, 살만한 세상이다. 원망을 해도 죽고, 안식일을 쉬지 않아도 죽고, 도망가겠다고 나서는 노예들을 못나가게 해도 죽고, 이스라엘인들의 뒤를 쫓아가도 죽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이렇게 하면 불구덩이에 떨어지고, 저렇게 하면 지옥에 가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야하고, 여호와와 그 일당들이 행하는 협박은 여느 폭력배들의 협박보다 조직적이고 악랄하다. 그곳에서 벗어나면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조직폭력배에게 시달리다 풀려난 느낌일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도 죽고 모세도 죽고 다음 지도자로 여호수아가 선택되었다. 여호수아는 말과 행동이 직선적인 순수한 군인이었다.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 땅을 뺏으려면 군인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동안 가나안은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미개한 이스라엘인들의 눈에는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기로 결심했고 우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여리고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탐을 위해서 두 명의 간첩을 보냈는데 라합이라는 창녀가 이들을 숨겨주었다. 라합은 이들 이스라엘인들이 여리고로 쳐들어 올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했고 두 간첩은 무사히 여호수아에게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여리고로 밀고 들어가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가축들을 살해했다. 여리고에서 살아남은 것은 창녀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뿐이었다고 바이블은 말한다. 여호와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멸절! 그들은 여리고 사람과 가축을 멸절시키고 가나안으로 입성을 했다. 450년간이나 그 땅에서 평화스럽게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여호와와 그를 믿는 잔인한 도적떼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절당한 것이다. 라합이라는 창녀 하나 남기고. 바이블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훌륭한 집단이고 그래서 그들의 간첩질을 도와준 라합은 현명하고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라고 찬양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 앉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논개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팔아먹는 이런 일을 도와준 창녀를 찬양하지는 말아야지. 이놈들은 지들한테 유리하게 하면 무조건 선한 것이다. 그놈들한테는 잘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멸절시키고 자기네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준 창녀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선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바이블이라는 엉터리 소설책에 자랑스럽게 쓰고. 또 그걸 읽는 정신병자들은 덩달아 이 나라 팔아먹은 창녀 라합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우리나라로 쳐들어오면 그들의 간첩질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순순히 나라를 내어 주는 놈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찬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바이블을 읽고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까봐 걱정된다. 다시 한 번 정확히 얘기하지만, 바이블은 아주 나쁜 책이고, 가나안으로 쳐들어가 그곳 사람들을 죽이고 땅을 뺏은 이스라엘인들은 도적떼다. 그리고 불과 50년 전에 다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 땅을 뺏은 이스라엘인들은 여전히 못된 버릇을 못 고친 도적떼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합은 결코 선한 사람으로 찬양받을 여인이 아니고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창녀이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놈들도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다 못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실제로 땅을 빼앗아 간 이스라엘인들은 더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차대전 직후, 팔레스티나인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한 못된 이스라엘과, 자신들이 2천년동안이나 살아오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티나인들을 두고, 이스라엘과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왜곡된 언론만 보고 평가하는 오류를 많은 사람들이 범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전쟁이니 분쟁이니 다툼이니 하고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는 침략이고, 강점이고, 학살이고, 살인이고, 강력한 범죄행위이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학살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힘없는 팔레스티나인들을 향해, 이 무지한 학살자들은 총칼과 탱크와 최신 전투기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곳 가나안 땅에서 수많은 팔레스티나인이, 그것도 아무 힘없는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죽어 나갔고,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학살자 이스라엘인들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이고 선이다. 바이블이 이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 못된 선입견만 버리고 읽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다시 한 번 라합이 아니라 논개 같은 선조를 둔 우리네 기생들이 나는 너무도 자랑스럽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점령을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했다. 가나안 땅을 하나하나 점령한 그는 땅을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가 기원전 약 1,400년경이었다. 이때부터 약 350년간 이스라엘은 12명의 사사가 차례로 다스리는 사사의 시대를 맞는다. 그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러면 여호와가 이들을 벌하고, 사람들이 구원을 바라고, 사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하고, 사사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또 다른 신을 섬기고 하는 역사가 반복된다.


사사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스라엘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국이 들어선다. 그 마지막 사사가 사무엘이고 첫 왕이 사울이다. 사무엘은 젖을 떼던 해에 대제사장인 엘리의 제자로 들어갔다. 엘리의 아들들과 같이 사무엘은 엘리를 모셨다. 당시엔 엘리가 죽고 나면 대제사장의 직위는 당연히 그 아들이 이어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는 이 아들들을 싫어하여 엘리의 아들은 모두 죽을 것이고 영원히 엘리의 집안에서 제사장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마침내 그 아들들이 모두 죽고 사무엘이 엘리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무엘은 여호와와 대화할 수 있는 사사가 되었다고 한다.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지고 다음 사사로 자신의 아들을 임명했으나 그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어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사사제를 폐지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왕권제를 확립하자고 했다. 사무엘이 이를 위해 기도를 하자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 베냐민지파의 사울이라는 청년을 선택했다. 사울을 찾아간 사무엘은 기름을 붓고 그를 왕으로 임명했다. 여러분은 이 대목을 잘 기억해 두시라. 분명히 여호와가 사울을 왕으로 선택했고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을 했다. 이때가 사울이 30살 청년이었으며,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겸손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1044년이었다.

그러다가 또 이 심술궂고 변덕스런 여호와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걸 후회하게 된다.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에게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불순종은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군과 블레셋군이 전쟁을 할 때 일어났다. 이때 이스라엘군은 겨우 3천명이었던 반면 블레셋군은 전차가 30,000대, 기병만 6천명이라고 했다. 자연 이스라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에서 7일 동안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약속한 7일이 지나도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이스라엘군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울은 스스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무엘이 나타났다. 약속기일보다 늦게 나타난 제사장 사무엘은 자신이 아닌 왕 사울이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린 사실에 대해서 화를 냈다. 그리고는 사울은 왕 자격이 없으니 왕을 바꿀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나 버린다. 여기에서 사울이 불순종하거나 잘못한 게 과연 무엇인가? 그는 사무엘과 약속한 7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과는 달리 사무엘이 7일내에 오지 않자 군사들이 사기가 떨어지고 겁에 질려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스라엘인들을 이끄는 왕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무엘을 대신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여호와 신봉자들이 잘 외치는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것도 아니다. 여호와를 상대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무엇이 잘못됐나? 바이블 해설가라는 엉터리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울은 여호와와 사무엘을 믿고 제사장인 사무엘 없이 제사를 지내지 말고 기다렸어야 옳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턱없이 모자라는 병사들은 계속 흩어져 가고 있고 약속한 7일은 지났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약 없이 기다릴 수 있겠는가? 3,000명이던 군사는 6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사울이 제사를 지내자 곧바로 사무엘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약속 내에 오지 않은 자신의 잘못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고 제사장인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 없이 여호와한테 제사를 드린 사울을 비난하고, 곧 왕을 갈아치울 거라는 저주만 남기고 그냥 돌아서 가버렸다. 여호와도 그렇지만 여호와와 대화를 하는 사사라는 사무엘이 하는 짓거리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마 여호와나 사무엘은 처음부터 블레셋에게 이길 자신이 없었나보다. 그러니 7일을 기다리라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가 사울이 스스로 제사를 지내는 걸 보고는 잽싸게 나타나 그를 비난하고 돌아서 나가버린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사무엘이 그렇게 나가버렸고 남은 사울은 600명의 이스라엘군을 이끌고 30,000대의 전차가 있는 블레셋군과 맞서 싸웠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활약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사울이 왕을 유지하지 못한, 여호와에 대한 첫 번째 불순종이다.

다음에 두 번째이자 결정적이자 마지막 불순종 이야기를 해보자. 너무나 인간적인 사울과 반면 너무나 악독하고 표독하고 사악한 여호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말렉군과의 전쟁 다음에 이 일이 일어난다. 이스라엘군은 아말렉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여호와는 사울에게 아말렉인들과 그 가축 전부를 멸절시키라는 특유의 잔인한고도 포악한 명령을 내린다. 멸절, 성절, 진멸로 표현되는 여호와가 즐겨 쓰는 이 말의 뜻은 모든 사람과 가축을 죽여 없애라는 것이다. 아예 씨를 말리는 것이다. 워낙이 처음부터 겸허하고 관대했던 사울이 어떻게 이렇게 악독한 말을 따를 수 있었겠는가? 사울은 아말렉 왕을 용서하고 사람과 가축의 전부를 죽이지를 않았다. 이를 알게 된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자신이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바이블에 뚜렷이 나와 있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하다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첫 번째 왕으로 사울을 정한 것을 후회한다니? 어떻게 보면 애처로울 정도로 앞뒤 안 맞는 바이블과 여호와가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해서 정한 왕이 자신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으니 얼마나 후회가 되고 안타까웠을까. 한 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후회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이 불쌍한 여호와를 어쩌면 좋을까요, 여러분.

결국 이 일로 인해 여호와는 왕을 사울에서 다윗으로 바꾸게 된다. 예수의 선조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첫 번째 왕으로, 그리고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버지로 끝없이 추앙받는 다윗이 이렇게 왕으로 뽑히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있던 다윗이라는 유다 지파 이새의 아들은 얼마 전에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무엘이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서 왕이 될 것을 예언 받았다. 다윗은 곧 사울 왕의 궁전에 수금의 연주자로 취직을 해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거인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명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은 이스라엘군의 대장이 되어 수차례의 전쟁에 참여해서 모두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군 내에서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사울과 다윗은 왕위를 향한 투쟁을 계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때는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은 왕인 사울의 명령에 의해 전쟁을 수행한 장군이었다. 다윗은 결코 사울이 차지한 왕위를 넘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엄격히 이것은 왕위다툼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반란이고 역적질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죽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이 두려워 그의 부하 600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서 블레셋 왕에게 몸을 의지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군인데 다윗은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의 적에게 기꺼이 목숨을 구걸했던 것이다. 그동안 사울은 무당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는 무당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했고 무당은 그의 요청대로 사무엘을 불러내 주었다. 엉터리 같은 여호와를 믿지 않고 사는 무당여자가 사무엘을 불러냈다고 바이블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이겠지. 바이블이 거짓말이거나, 신이라고는 여호와밖에 없다는 게 거짓말이거나. 왜냐하면 여호와를 믿지 않는 무당 여자가 여호와와 대화하는 사사인 사무엘을, 그것도 그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을 아무 어려움 없이 불러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이블을 쓰는 이 엉터리 망상가는 스스로 저지른 이 오류도 발견하지 못하고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불려나온 사무엘은 왕위는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이며 다윗이 투항해 가 있는 블레셋과의 다음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고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0살 젊은 나이에 여호와에 의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받고 수많은 적들과 싸우며 이스라엘과 여호와를 위해 살아온 불쌍한 사울은 이렇게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왜? 여호와에게 불복종했기 때문에. 어떤 불복종을 했지? 어떤 죽을 짓을 사울은 한 거지? 사무엘이라는 제사장 없이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리고 적은 수의 군사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적과 싸워 이긴 죄가 그 하나요, 전쟁에서 진 상대편 적들을 사람이고 가축이고 모두를 죽여 없애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적들에게 자비를 베푼 죄가 그 둘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사울은 왕으로 선택 당했다가 다시 왕위를 다윗에게 넘겨주고 비참하게 죽어 나간 것이다. 이런 내용도 잘 모르는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바이블 신봉자 후손들에게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지만 여호와의 명령에 불복종하다가 왕위를 빼앗긴 나쁜 왕이란 이미지만 남기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윗이라는 목동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해 간 쿠데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블레셋이라는 적군까지 끌어들인 더러운 반역행위였던 것이다.

사울이 죽고 난 후에도 다윗은 쉽게 왕이 되지 못한다. 그만큼 사울의 지지자들이 남아 다윗에게 대항했던 것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다윗은 나이 30세가 되는 기원전 1011년에 유다지파의 왕으로 취임하여 계속 사울의 지지자들과 싸우다가 7년 후에야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첫 번째 왕으로, 솔로몬의 아버지로, 예수의 조상으로, 이스라엘인과 뿌리를 잃어버리고 객귀에 정신을 빼앗긴 바이블 신봉자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존경하는 다윗왕은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훌륭한 다윗왕께서 어떤 일을 했는지 바이블에 나와 있는 대로 얘기를 해보자. 양치기였던 다윗은 여호와에 의해 선택당하고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예언된 이후 사울 밑에서 블레셋군들과 싸워 이겼으며 자신의 힘과 인기를 믿고 사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힘의 열세를 깨닫고 그때까지 적군이었던 블레셋군에 투항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사울을 죽이고 마침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가 7년간이나 동족과의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바이블에는 이 7년간의 전쟁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이후에 다윗의 통치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 아마 반란을 일으키고 적과 내통하고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데 백성들을 잘 다스려 나가는 데는 별 소질이 없었나 보다. 왕이 된 이후의 얘기는 다음 하나가 자세하게 바이블에 나와 있다. 아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니 잘 들어 보시라.

어느 날 다윗은 궁전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라고 하고 아주 용감하고 훌륭한 다윗군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다. 마침 우리아는 전선에서 적들과 교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란한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 수차례에 걸쳐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러다가 밧세바는 임신을 하고 말았다. 다윗은 어마 뜨거라 하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남편 우리아는 수개월째 전선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집에 있는 그의 아내 밧세바가 임신을 했으니 말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교활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낸다. 그는 전쟁 중인 우리아에게 전황을 보고하라며 급히 궁으로 불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아 장군은 궁으로 들어가 왕에게 전쟁 상황을 보고했다. 보고를 다 들은 다윗은 우리아의 노고를 치하하고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했다. 우리아 장군이 아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만들기 위한 일이었다. 여호와가 좋아할 만큼 교활한 다윗의 잔꾀였다. 하지만 다윗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우직한 장군이었던 우리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궁전 마당에 텐트를 치고 다른 병사들과 함께 밤을 보냈던 것이다. 다윗은 술까지 내어 우리아를 취하게 만들려고 했으나 우리아는 자신의 병사들이 전선에서 고생하는데 혼자만 집에 가서 아내와 따뜻이 잘 수는 없다고 했다. 다윗 같은 바람둥이 왕 밑에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훌륭한 장군이었다.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하자 다윗은 좀 더 확실하고 잔인한 방법을 생각해 낸다. 전선의 총지휘관인 요압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최격전지의 일선으로 보내고, 그만 남기고 모두 퇴각하여 그를 적진에서 죽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여호와의 하해와 같은 보살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할렐루야! 여호와 만세! 다윗대왕 만세! 우리아는 전사하고 미망인 밧세바는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다윗과 결혼하였다. 다시 한 번 할렐루야! 여호와 만세! 다윗대왕 만세! 밧세바와 다윗의 결혼을 축하합시다! 콩그래쥬레이션!!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저 예쁜 마누라를 가진,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똑같이 먹고 잠자며, 왕과 백성들을 이해 용감히 싸워온, 아주 나쁜 우리아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 아내까지 뺏기고 적진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사울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 궁전에 앉아 남의 와이프나 탐내다가 결국은 임신까지 시키고 그게 들킬까봐 그 정부의 남편을 살해한 신앙심 깊고 착한 다윗은 여호와의 축복을 받아 정부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이런 걸레 같은 책이 있나? 그게 바이블이다. 그리고 놀라지 마시라. 이 다윗과 밧세바 두 정부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두 번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솔로몬 대왕이시다. 다시 한 번, 할렐루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교활하고 지저분하고 나쁜 책이 바이블이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바이블의 악행들로 인해 내 입이 더러워지고, 내 손이 더러워지고, 여러분의 눈이 더러워질까 두렵다. 하지만 어떡하랴, 바이블에 그렇게 쓰여 있는걸. 그리고 이건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런 잔인하고 더러운 얘기를 감히 지어낼 수가 없다. 상상하기조차 힘이 드는 게 아닌가? 여하튼 바이블을 지은 놈들은 대단한 변태새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잠깐, 다윗의 죄를 십계명에 대입하여 보자. 앞서 말했듯이 십계명은 앞의 다섯 가지는 여호와 내지는 신에 관한 것이고 뒤의 다섯 가지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와 관련하여 저지른 죄는 인간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이 다섯 가지 죄를 모두 범한 것이다. 1. 살인을 하지 말라. 2. 간음을 하지 말라. 3. 도둑질을 하지 말라. 4.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5.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 어떤가? 상식적인 사람이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아를 죽이고 나서 이 두 정부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7일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이스라엘 최고의 왕,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그러니 원래 솔로몬의 어머니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욕심 많고 잔인한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리아라는 장군의 아내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왜 이 착하고 선한 우리아는 전장에서 죽고 교활하고 음란한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도 밧세바를 차지하여 솔로몬까지 낳게 되는지, 여호와의 정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바이블 해설자라는 족속들은 이런 의문에 대하여 이런 잘못을 저지른 다윗마저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는, 은혜롭고 자비스러운 분이 여호와이시니 선한 사람들에게는 더한 복을 주시지 않겠나? 그러니 여호와를 믿고 무한한 복을 받으라 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노아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그리도 깡그리 죽여 버렸나? 그래서 선량한 이집트인의 장자라는 장자는 모조리 도륙을 해버렸나? 그래서 황금으로 소를 만들어 여호와라 믿고 숭배를 한 3,000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처형했나? 다윗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전장에서 병사들과 고생을 같이 하며 다윗과 백성들을 위해 살아온 우리아는 어떻게 되었나? 그는 어떤 복을 받았나? 여호와와 다윗에게 아내를 뺏기고 싸늘한 시체가 된 게 착한 사람에게 주는 복인가? 또 일부 사람들은 비록 다윗이 이런 악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곧바로 반성을 했다. 그러면 우리의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잘못을 했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이블을 믿고 여호와를 따르는 그 무리들은 그렇게도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반성하는 것으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일주일 동안 내내 악행이라는 악행은 골라서 하다가, 일요일에 한 번 반성하고 나면 자신만 선하고 깨끗한 사람이고 나머지 세상 사람들은 다 더러운 죄인으로 생각하니, 그 못된 버릇이 바로 이 바이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 음행과 악행을 반성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나? 그 대답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바이블에 의하면 다윗은 아들만 19명이라고 했다. 딸들도 비슷한 수가 있었을 것이니까 40명의 자식에 아내만 10명이었다고 한다. 다윗의 음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 자식들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 하나를 살펴보자. 다윗의 장남의 이름은 암논이었는데 배다른 여동생인 다말에게 흑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의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그에게 이미 다말은 여동생으로 보이지 않고 어떡해서든 차지해야할 욕정의 대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여러 가지로 기회만 엿보던 그는 어느 날 거짓으로 병들었다 핑계대고 자리에 누웠다. 다윗의 장남이면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이 아닌가? 모든 형제들이 문병을 왔고 드디어는 다말도 오빠의 문병을 왔다. 암논은 다말과 둘이 남게 되자 강하게 거부하는 그녀를 힘으로 눌러 욕정을 채우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욕정을 채우고 나니 그때까지의 다말을 사모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녀를 증오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밖으로 내쫓았다. 다말은 ‘당신이 지금 나를 내쫓는 것은 나를 욕보인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하고 저항했으나 그는 그녀를 내쫓고 방문을 걸어 잠궜다.

바이블 신봉자들이여, 여러분은 다윗을 존경하고 그 집안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는가? 당신의 아이들을 훌륭한 다윗이나 그 자손들처럼 기르고 싶으신가? 왕이라는 지위를 악용하여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그 아내를 빼앗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정부의 남편을 죽이고, 자신의 욕정을 풀기 위해 누이동생을 겁탈하고, 욕정을 채운 후에는 그 자리에서 내쫓고 방문을 걸어 잠그는 그런 아이로 기르고 싶으신가? 하지만 당신들의 아이들이 그렇게 될까봐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라 본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이블같은 악서에나 나오는 악하디 악한 이스라엘의 조상, 유대인의 조상, 예수의 조상들 중의 일부 얘기이다. 결코 상식적인 교육을 받고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우리 한국인 아들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바이블같은 엉터리 책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오빠에게 겁탈당하고 방에서 쫓겨난 다말은 울면서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으로 갔다. 동생이 이런 꼴로 자신을 찾아 왔으니 그 오빠 되는 압살롬의 마음이 오죽 했겠나?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동생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했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다윗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를 않았다. 다윗이 침묵을 지킨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밧세바나 우리아에게 했던 일이 마음에 남아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만한 일이야 크게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됐든 암논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그 사건은 무마가 되었다. 하지만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결코 이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압살롬은 암논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고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부하에게 시켜 암논을 칼로 찔러 죽였다. 누이동생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리고는 그술이라는 곳으로 피신을 해서 3년간을 숨어 지내게 된다.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몹쓸 짓을 한 다윗의 자식들은 이렇게 해서 근친상간과 형제간의 살인이라는 하늘 아래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악행이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여호와가 지명한 이스라엘의 왕인데 이런 정도로밖에 나쁘고 말 집안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암논이 저지른 잘못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지는 않았었나보다. 서로 반목하고 있는 부자간이 주위의 설득으로 마침내 화해하여 3년간을 그술에서 피신을 하고 있던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음행을 저지르고 공정한 재판을 하지 못했던 다윗에 비해 사람들은 압살롬을 더 좋아했었나 보다. 이스라엘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압살롬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켜 왕위찬탈을 노렸다. 처음의 전세는 이스라엘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압살롬에게 유리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 예루살렘을 버리고 충실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피신을 갔다. 10명이나 되는 후궁들도 데리고 가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궁에 입성한 압살롬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가시는가? 이스라엘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 10명과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는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다윗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공공연히 보이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부자간의 연을 끊음으로서 신하들이 애매한 태도를 버리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압살롬은 실제로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다윗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했다.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던 이것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아버지의 여자이면 자신에게는 어머니나 마찬가지 아닌가? 서양귀신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동양적인 사고를 가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짐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바이블이라는 책을 들고 있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 전세가 역전되어 마침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죽이고 다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윗은 다시 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되어 번영을 누렸다고 바이블이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잘 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다. 다윗은 좋아 죽으려고 했겠지, 아들을 이기고 다시 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윗이 늙고 병들자 그 많은 아들 중에서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음 왕이 되게 했다. 남은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게 관례인데도 말이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아도니야를 포함한 모든 정적들을 죽이고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위대한 솔로몬왕이 탄생하기 위해서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것이다.

사울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고 약 100년이 흐르고 나서 이스라엘은 그 특유의 질시와 반목과 다툼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나뉜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왕국이 각각 약 200년 및 350년간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이 사악한 무리들은 그 나라마저 유지하지 못한 채 폭탄의 파편처럼 세계 각지로 흩어진다. 그리고는 이 근본도 없는 사악한 무리들은 2,000년 뒤 평화를 사랑하는 팔레스타나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며 탱크로 밀고 들어와 남의 땅을 빼앗았고 아직도 잔혹한 학살을 계속하며 땅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철저히 응징되는 날, 그야말로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정의가 실현되고 그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그런 날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를 듣고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막혀 말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지독한 악의를 가지고 전부 지어낸 얘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나라도 이런 얘기를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내가 한 모든 얘기가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전부 다 내가 지어낸 얘기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바이블을 꺼내 읽어보시라. 내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얘기를 지어낸 곳이 있는가를 살펴보시라. 이 모든 것은 정확히 바이블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난 이런 잔인하고 사악한 얘기들을 지어낼 능력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런 얘기를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은 바이블 저자들 말고는 없다.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이런 얘기는 바이블에서 말고는 읽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까지가 구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서 예수 얘기를 해보자.


최소장이 글을 다 읽었을 때는 밤도 제법 깊어 있었다. 그도 박순경도 하루 종일 이 글만 읽고 있었다. 지혜도 파출소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이 글을 읽은 최소장의 느낌이나 박순경, 또는 지혜의 느낌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글을 읽었고, 있는 그대로 느꼈고,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을 뿐이다. 단지 한 가지 얘기해두고 싶은 것은 그들 세 명 다 그렇게 뛰어나지도 그렇게 모자라지도 않는 지극히,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